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영남 대작 사건 (문단 편집) ==== 관점 2: 기계적인 수작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구상작업이다 ==== 하지만 현대미술계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작가나 전문가도 많았다. [[마르셀 뒤샹]] 이후 현대미술은 더이상 그런 수작업이나 기교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돌을 깎아내고 붓질을 하는 기계적인 반복작업을 열심히 했다고 그게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구상만 했다고 성의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이었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수작업보다 창의적인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대작 관행'에 대해 설명했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4519&yy=2016|#]] > 화가 조영남 씨가 제 작품을 다른 이에게 ‘대작’을 시킨 사실이 드러나자 검찰이 ‘사기죄’로 엮어 수사에 들어갔다. 정의로운 대중은 인터넷에 분노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이는 현대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과잉행동이다. 적어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그리고 팝아트 이후 예술가가 작품에 ‘콘셉트’만 제공하고 실행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예술계의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br][br] 효시는 바우하우스의 모호이-나지일 것이다.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전화-회화’를 선보였다. 그는 전화로 이미지의 좌표와 색상을 알려주고 제작을 아예 간판 집에 맡겨버렸다. 60년대의 미니멀리스트 토니 스미스 역시 철공소에 전화로 작품의 제작을 의뢰하고 심지어 배달까지 시켰다. 같은 시기에 개념미술가 솔-르위트는 수학 공식만 주고 직공들에게 그 공식에 따라 벽에 도형을 그려나가게 했다. [br][br]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아예 ‘공장’을 차려놓고 조수들에게 작품의 실행을 맡겼다. 대중의 눈에는 이게 이상해 보이겠지만, 사실 이 이상한 관행의 바탕에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깔려 있다. 즉, 어떤 대상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예술가의 ‘솜씨’가 아니라 ‘콘셉트’라는 관념이다. 이 새로운 관념을 창조한 사람은 물론 ‘사인’만으로 변기를 작품으로 둔갑시킨 마르셀 뒤샹이다. 다만 진중권은 대작 관행에도 한도가 있다고 선을 그으면서 구체적으로 낮은 대가 지불, 대작 관행이 이뤄지는 특정 예술 경향과 다른 조영남의 작품 특징, 대작 사실을 투명하게 밝히지 않음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 이처럼 예술의 본질이 ‘실행’이 아니라 ‘개념’에 있다면 대작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림을 대신 그려준 그 작가도 ‘콘셉트는 조영남 씨에게 받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는다. 왜 그럴까? 일단 내 심기를 거스른 것은 대작 작가가 받았다는 터무니없이 낮은 ‘공임’이다. 작품당 10만원 남짓이라나? 자신을 ‘작가’라 여기는 이에게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액수다. [br][br] 문제는 거기에 있다. 조영남은 그 작가가 ‘노동’을 했고 그 대가로 ‘공임’을 받은 것뿐이라 믿는다. 반면, 작가는 자신이 ‘작품’을 했고 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 갈등은 대작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개념미술가나 미니멀리스트, 팝아티스트들이 남에게 작업을 맡길 경우, 맡겨진 그 작업은 대개 기계적`반복적`익명적인 부분에 머문다. 즉, 예술가의 개인적 터치가 느껴질 수 없는 부분을 맡긴 것이다. [br][br] 대행의 관행이 주로 미니멀리즘`개념미술`팝아트와 같은 특정 영역에 한정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관행이 아무 데서나 용인된 것은 아니다. 물론 ‘화투’를 그린 데서 볼 수 있듯이 조영남은 팝아티스트의 제스처를 취한다. 작품을 판매하는 방식도 ‘팝’스럽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 시킨 것은 워홀의 경우처럼 익명성이 강한 복제의 작업이 아니라, 그린 이의 개인적 터치가 느껴질 수도 있는 타블로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다. [br][br] 또 하나, 미니멀리스트`개념미술`팝아티스트들은 내가 아는 한 작품의 실행을 남에게 맡긴다는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워홀은 ‘나는 그림 같은 거 직접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녔다. 남에게 작품의 실행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작품 콘셉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영남의 경우 내가 아는 한 그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다니지 않았다. 여기에 또 다른 모호함이 있다. [br][br] 물론 작가에게 꼭 그 사실을 밝히고 다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내 작업의 콘셉트에 대행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니, 미술사에 대한 막연한 지식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행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의 미학적 관념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라면 그의 윤리적 의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기고문에서 진중권은 이 문제는 '비평과 담론으로 다루어야 할 미학적-윤리적 문제이지, 검찰의 수사나 인터넷 인민재판으로 다루어야 할 사법적 문제는 아니다'라고 보았다. 사실 진중권이 쓴 글을 읽으면 진중권이 말하고 있는건 미술계의 '대작' 관행이 아니라 미술계의 '협업' 관행에 관한 설명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1) 작품의 기본 설계인 콘셉트를 작가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조수들은 단지 그 콘셉트를 실물로 제작할 때 필요한 기계적 반복작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만 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 작가는 조수에게 숙식이든 노하우 전수든 급료 지불이든 충분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3)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협업'한 것임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 [[데미안 허스트]]나 [[무라카미 다카시]]의 경우 1), 2), 3) 다 충족한다. 이들은 작업하면서 수십명 이상의 스태프들과 사실상 한 배를 탄 입장이다. 사실상 이런 대규모 팀을 꾸려 작업하는 작가들은 중소기업 사장이나 다를 바 없고 작품이 안 팔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조수들까지 굶어야 한다. 정작 이런 작가들은 그렇게 작품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막상 이득을 조수들과 나누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데 또 돈을 쓰면 항상 돈이 모자란다고 한탄하는 형국이다. 사실 기고문 자체만 놓고 보면 조영남을 옹호했다기보다는 비판한 쪽에 가까워 보인다. ''''대행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그의 미학적 관념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라면 그의 윤리적 의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 자체가 별로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진중권의 기고문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트위터나 기고문으로 진중권을 비판하던 자들 중에는 진중권의 글 앞부분만 보고 뒷부분은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서 내용처럼 진중권은 작품 콘셉트가 조영남 자신의 콘셉트냐, 송기창씨에게 공정한 댓가를 지불했느냐, 협업 사실을 밝혔느냐의 여부만 문제삼았는데 헛다리 짚고 열심히 열올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트위터에서 진중권은 비판하는 사람들과 설전을 벌이면서 “조영남이 직접 그린 것으로 알고 샀다고 해도 그림의 핵심은 작가의 콘셉이고 콘셉이 작품에 담겨 있다면 거래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사기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16&aid=0001055718|#]] 사기죄나 모욕죄로 조영남을 비판하고 고소하는 꼴을 비판한 것이다. 주의할 점은 진중권은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지 다른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실제로 그는 조영남은 사기죄가 아니라 노동법 위반이라 주장한 바 있다.[[http://www.sedaily.com/NewsView/1KWD0S4XNE|#]] 미술평론가 반이정 또한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미술계의 현재 메타에 대해 모르는 대중의 무지를 비판했다.[[http://www.huffingtonpost.kr/ejung-ban/story_b_10135980.html|#]] 특히 반이정은 주문-제작 관행(대작 관행)을 과거의 수공업 방식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 '''관행은 루비콘 강을 건넜는데 '미적 러다이트'들은 뒷북 난동을 부린다''' [br][br] 그들이 성토하는 주문-제작의 관행을 개인 창작의 낭만적 전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불가능하다. 왜 되돌릴 수 없을까? 자명하다. 이번 사태와 주문-제작 관행을 비판하고 부인하는 평론가들에게 그들이 남긴 지난 강연과 글을 되돌아보라고 말하련다. 그들의 강연과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격찬한 미술가 중에, 정확한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조수를 고용한 미술가가 아마 절대 다수를 차지할 게다. '장막에 가려 규모와 실상'을 파악할 수 없는 개인 스튜디오 화가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지구촌 평론가라면 여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중략) [br][br] 주문-제작 관행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조수를 고용한 작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주문-제작으로 얻은 완성도 높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바로 미술계의 관행이다. 유능한 개인 요리사의 명성이 알려지자, 수요가 급증해 전문 보조원 여럿을 두고 그의 이름을 단 매장을 확대했다 치자. 흔한 일이다. 이전보다 완성도가 높은 요리가 제공될 것이고 고객과 언론의 만족과 평가도 상승할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요리사 개인기'를 향한 낭만을 환기시킨다 한들 이미 탄탄히 구축된 협업 체계가 원점으로 되돌아올까? 불가능하다. 입맛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고객과 언론부터 그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빗대면, 대중적 공감을 살 법한 '수공의 미덕' 따위를 내세우면서 기계를 파괴하자고 외치는 미적 러다이트들은 그들 스스로 과거에 가담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중략) [br][br] "스튜디오 명칭을 작가 이름 대신, 서명으로 쓰는 건 어떨까요?"(중략) [br][br]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 화가와 조수가 관여한 작품은 유사한 관계이니 저런 제안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저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의 물리적인 완성 대부분을 100여명의 조수가 대행하니, 그가 운영하는 회사 이름을 따서 'ⓒkaikai kiki'라는 서명이 ⓒmurakami takasi보다 객관적인 사실일 게다. 그럼에도 회사명을 쓰는 서명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그걸 전시하는 기획자, 작품을 거래하는 아트딜러나 급기야는 그걸 감상하고 구입하는 관객과 구매자마저 원치 않는 바다. 이런 판단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진다. 스튜디오가 공개되어 주문-제작의 관행이 엄연한 사실로 확인됐음에도 그렇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은 미술과 요리를 감히 어떻게 동일선상에 비교하고 볼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지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게 맞다.''' 미각과 시각은 다르지만 자극을 주고 만족을 준다는 점에서 요리와 미술은 동등한 '기술'일 뿐이다. 현대미술은 과거의 고전미술처럼 지고지순하고 우월한 진리를 찾는 분야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소중한 차이를 찾으려 애쓰는 분야다. 과거의 미술이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답고 웅장한 신상을 만들었다면 현대미술은 그 우월성에 억압당했던 타자들에 관심을 보이기 위해 사소하고 추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술은 다른 기술과 다른 뭔가 고상한 정수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아집을 드러내는 태도일 뿐이다. 또 반이정이 소위 '미적 러다이트'들이 스스로 과거에 가담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진실을 호도한다고 말한 것은 낭만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는 예술가들조차도 결코 현대 자본주의의 분업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함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기차나 사진같은 신기술에 의해 피폐해지는 산업사회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감성으로 이에 맞설 수 있다고 착각했다. 고흐가 혼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고 고갱이 타히티로 떠난 이유를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미 당시 시각문화는 광고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상업주의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업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 이 새태를 비틀어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을 할지를 고민해야지, 이미 수백년 전에 끝난 메타를 자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수백년전에 끝난 미술계 메타를 좀비마냥 계속 끄집어내 미신처럼 반복하고 있다. 더 이상 예술가는 붓질로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아니고 혼자 고독하게 작업할 수도 없으며 현대 세계화와 정보화의 흐름에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여전히 과거의 고흐처럼 어떻게 자신만의 화풍(또는 서명같이 구분되는 특징)을 완성시킬지만 고민한다면 이는 한참 뒤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그런 그림은 컴퓨터로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이정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추신에서 이후에 벌어질 사태가 뻔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 ps. 조영남 대작의 풍랑이 잦아든 후 벌어질 현상을 단정적으로 예측해본다. [br][br] 1.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대중의 73.8%는 작업을 완성하는 천재 개인 예술가의 신앙을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br][br] 2.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미술가를 다루는 교양 방송 프로그램과 미디어는 작업실에 고독하게 서있는 미술가의 모습을 대중에게 전파할 것이다. [br][br] 3.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조영남과 대작 관행을 성토했던 평론가들은 강연과 지면에서 조수를 고용한 수많은 예술가들을 이전처럼 인용하고 격찬할 것이다. [br][br] 4.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홀로 작품 제작에 임하는 절대 다수의 미술가들은 유명 작가들의 주문제작 관행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br][br] 5. 대중적 공분과 언론의 맹공과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십 수 명을 거느리고 주문-제작으로 작업을 완성해온 무수한 미술가들은 평시처럼, 해오던 공정대로 작업을 완성해 전시장에 걸 것이다. [br][br] 6. 끝으로.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조영남은 물의를 일으킨 데에 고개 숙여 사죄한 후, 그가 진행했던 방송 무대로 복귀할 것이다. 어쨌든 반이정은 송기창씨가 "새로운 그림을 내가 창조적으로 그려서 주는 것은 아니다. 조씨가 아이템을 정해서 알려주면 나는 그 그림을 똑같이 여러 장 그려서 조씨에게 가져다준다."[[http://www.artreset.com/?c=1/38&uid=373|#]]고 진술했던 점을 들어 조영남의 화투 도상은 조영남이 수십 년 전에 개발한 독자적인 아이템인 게 맞다고 보았다. 대작 작가인 송기창씨에게 '화투가 말탄 그림 그려줘.' 하는 식으로 작업한 것을 두고 과연 조영남이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앞서 말한 세 가지 조건을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1) 작품의 기본 설계인 콘셉트를 작가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조수들은 단지 그 콘셉트를 실물로 제작할 때 필요한 기계적 반복작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만 맡는다. 2) 작가는 조수에게 숙식이든 노하우 전수든 급료 지불이든 충분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3)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 '협업'한 것임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1)의 작가가 콘셉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의 측면에서 봤을 때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없진 않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2)와 결부되는 문제인데 조영남이 자기 개인 만족용으로 작업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가 나중에 수백배 폭리를 취해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대작 작가인 송기창씨는 숙식을 제공받은 것도 아니고 어떤 미술 창작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도 아니며 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다. 애초에 미술경력으로만 보면 송기창씨가 더 고수다. 조영남이 줄 노하우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조영남 측은 “조수, 알바 개념”이라고 변명했지만 자기보다 더 경력이 많은 사람을 부려먹는 건 조수도 아니고 알바도 아닌 것이다. 이건 학부생이 대학교수를 부려먹고 몇십만원만 댓가로 주고 '알바로 쓴 것 뿐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꼴인 것이다. 동시에 이는 3)과도 결부된 문제로, 차라리 처음부터 협업관계라고 말하고 작업했으면 미더워도 뭐라고 지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뒤늦게 밝혀지니까 조수니 알바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조영남이 미술계 작업방식을 잘 모른다는 반증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영남 사건은 [[이말년]]이 그린 만화의 상황을 꼭 빼닮았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03759&no=47&weekday=wed|#]] 미술평론가 홍경한은 조영남과 일부 전문가들이 모든 작가가 대작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미술계의 부당한 대우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대중의 예술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ieta999&logNo=222012320819&proxyReferer=https:%2F%2Fwww.youtube.com%2F|#]] 이미 각종 예술계가 이러한 관점에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많아 세계적으로 저작권법은 최초 구상자에게 유리한 판례가 나오고 있다. 만약 조영남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만화]],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그리는 대리 작업자가 많은 작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들이 조영남의 유죄 판결에 따라 각자의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작품의 저작권이 공중 분해되고 말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